[1부] 8화. 얼음 바다
유스틴은 죽었다. 편히 잠들었다. 나는 살아 있었다.
심장은 뛰고 피는 돌았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형벌이었다.
잠이 달아났다. 사람의 얼굴을 피했고, 웃음소리가 들리면 자리를 떴다. 위로의 말은 전부 고문이었다.
혼자 있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한때 나는 인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으로 살았다. 그 꿈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고, 여기서 전부 재가 되었다.
돌아볼 과거도, 기대할 내일도 남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런 나를 오래 지켜보았다. 어느 날, 조용히 내 어깨를 잡았다.
"빅터, 나도 아프다."
"그 아이를 나만큼 사랑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남은 사람들을 생각해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옳은 말이었다. 나에게만 닿지 않는 말이었다.
슬픔이라면 나도 삼킬 수 있었다. 내 안에 든 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죄였다.
아버지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벨리브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는 그 이사가 반가웠다. 성문이 닫히는 도시와 달리, 그곳에선 밤의 호수가 열려 있었다.
가족이 잠들면 배를 몰고 나갔다. 바람에 돛을 맡기고, 호수 한가운데서 노를 놓았다.
물은 검고 고요했다.
세상이 이토록 평온한데, 떠도는 것은 나 하나였다.
뱃전 아래에서 물이 찰랑거렸다. 저 밑은 조용하겠지. 어둡고, 깊고, 아무것도 묻지 않겠지.
이대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끝난다.
몸이 기울었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없이 남겨질 사람들. 그리고 그들 곁을 맴돌, 내가 풀어놓은 그것.
내가 죽으면 누가 저들을 지키나.
나는 노를 다시 잡았다. 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살아서 지켜보는 나날은 그 자체로 다른 형벌이었다. 그것이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다. 언젠가 또 일을 저지른다. 지난 일을 잊게 만들 만큼 끔찍한 일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두려움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두려움 밑에서, 갈망 하나가 자랐다.
그것을 다시 만나고 싶다. 만나서, 이 손으로 그 목숨을 도로 거두고 싶다.
윌리엄과 유스틴의 몫까지.
이가 갈렸다. 내가 붙여 준 생명이었다. 내가 꺼야 했다.
집은 초상집이었다. 아버지는 눈에 띄게 늙었고, 엘리자베스는 웃음을 잃었다.
"이제 세상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아."
어느 저녁,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책에서 읽던 악행은 멀리 있는 이야기였는데. 이젠 사람들이 서로의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보여."
"모두가 유스틴을 범인이라 믿었지. 하지만 아니야. 그 애는 결백했어. 나는 알아.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알아."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윌리엄과 유스틴은 살해당했어. 그런데 범인은 지금도 어딘가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겠지. 어쩌면 존경까지 받으면서."
거짓이 진실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누가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벼랑 끝을 걷는 기분이야. 수천 명이 몰려와서 나를 아래로 떠미는 것 같아."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범인은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정도가 아니다. 범인을 만든 자는 지금 네 앞에 앉아 있다.
엘리자베스가 내 손을 잡았다.
"빅터, 요즘 네 얼굴에 무서운 게 있어. 절망 같기도 하고, 복수 같기도 한 거."
"제발 그런 건 떨쳐 버려. 우리가 있잖아."
나는 대답 대신 그녀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위로받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이 어둠 속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을까 봐.
그 말이 나를 구했어야 했다. 사랑하는 목소리조차 뚫지 못하는 구름이, 이미 나를 감싸고 있었다.
화살 맞은 사슴이 아무도 오지 않는 덤불로 기어들어, 제 몸에 박힌 화살을 들여다보며 죽어 간다던가.
그게 나였다.
집에 머물수록 숨이 조였다. 팔월 중순, 나는 혼자 집을 떠났다. 말을 몰아 알프스의 골짜기로 향했다.
샤모니. 어린 시절 여러 번 오르던 계곡이었다.
육 년 만이었다. 나는 폐허가 되었는데, 산은 그대로였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어깨의 짐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사방에서 절벽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강이 바위를 때리며 울부짖었다. 인간 따위는 셈에 넣지 않는 힘이었다.
그 무심함이 위로가 되었다.
소나무 숲 절벽에는 무너진 성들이 매달려 있었다. 사람이 쌓은 것은 스러지고, 그 위로 알프스의 흰 봉우리들만 다른 세상처럼 빛났다.
계곡 안으로 들어서자 풍경이 변했다. 빙하가 길가까지 흘러내려 와 있었다. 눈사태의 우레가 골짜기를 굴렀다. 그 모든 것 위로 몽블랑이 솟아 있었다.
다른 세계의 것 같은, 눈부신 흰 돔.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잠들었다.
다음 날은 하루 종일 계곡을 떠돌았다. 빙하에서 태어나는 강의 발원지에 서 보았다. 머리 위로 얼음 벽이 드리웠고, 정적을 깨는 것은 무너지는 얼음의 굉음뿐이었다.
이 거대함 앞에서 내 슬픔은 하찮아졌다. 사라지진 않았지만, 조용해졌다.
그날 밤 꿈에는 낮에 본 것들이 모여들었다. 눈 덮인 봉우리, 구름 사이를 도는 독수리.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말하는 듯했다. 이제 그만 평안하라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전부 달아나고 없었다.
비가 쏟아졌다. 안개가 봉우리를 전부 삼켰다.
상관없었다. 나는 몽탕베르에 오르기로 했다. 그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얼음의 바다가 예전의 나를 벅차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안내인은 부르지 않았다. 이 장엄함은 혼자 마주해야 했다.
길은 가팔랐다. 겨울 눈사태에 부러진 소나무들이 비탈에 널브러져 있었다. 낙석이 구르는 골을 몇 번이나 가로질렀다. 그중 한 곳은 큰 소리 한 번에도 머리 위로 돌벼락이 쏟아진다는 길목이었다.
숨을 죽이고 지났다. 발아래 골짜기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산허리를 감았다.
정오 무렵, 정상에 닿았다.
발아래 얼음의 바다가 펼쳐졌다.
파도가 치다가 그대로 얼어붙은 것 같은 표면. 깊게 갈라진 틈들. 안개가 걷히자 건너편 봉우리들이 드러났고, 그 모든 것 위에 몽블랑이 있었다.
가슴이 부풀었다. 몇 달 만에 처음 느끼는, 기쁨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빙하로 내려섰다. 갈라진 틈을 피해 두 시간을 걸어 빙원을 건넜다. 바위 그늘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떠도는 영혼들이 있다면, 내게 이 순간만 허락해 다오. 아니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다오.
그때였다.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의 형체였다. 그러나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 내가 조심조심 피해 온 얼음 틈을, 그것은 단숨에 건너뛰며 왔다.
가까워질수록 키가 드러났다. 사람의 키가 아니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산의 찬바람이 정신을 후려쳐 깨웠다.
그것이었다.
내가 만든 것.
분노가 공포를 태워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오면 죽인다. 그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멈춰 섰다. 거대한 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고, 노란 눈이 나를 응시했다. 역광 속의 그 얼굴에는 고통과 멸시가 뒤엉켜 있었다.
"악마."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감히 내 앞에 나타나? 꺼져라. 아니, 거기 있어라. 짓밟아서 먼지로 만들어 주마."
"네가 죽인 목숨들을 그걸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런 대접일 줄 알았다."
그것이 말했다.
나는 얼어붙었다.
말을 한다.
"모두가 비참한 것을 미워하지. 그러니 살아 있는 모든 것 중 가장 비참한 나는, 얼마나 미움받아야 하나."
낮고 또렷한 발음이었다. 한 단어씩 공들여 배운 자의 말투.
"너는 나의 창조주다. 그런 네가 나를 혐오하고 짓밟는구나.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끊어지는 인연인데."
그것이 한 걸음 다가섰다.
"네가 내게 진 의무를 다해라. 그러면 나도 너와 인간들에게 내 의무를 다하겠다. 내 조건을 받아들이면 모두를 평화롭게 두마."
"거부하면, 네게 남은 사람들의 피로 죽음의 아가리를 채우겠다."
의무. 조건.
그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나를 미치게 했다.
"닥쳐라! 지옥의 고문도 네 죄에는 모자라다. 내가 경솔하게 붙인 불씨다. 내 손으로 꺼 주마!"
이성이 끊겼다. 나는 그것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가볍게 비켜섰다. 내 손은 허공을 갈랐다.
"진정해라. 증오를 쏟아 내기 전에, 내 말부터 들어라."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고통받지 않았나? 이런 목숨이라도 내게는 소중하다. 그러니 지킬 것이다. 기억해라, 너는 나를 너보다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너와 싸울 생각은 없다. 나는 너의 피조물이다. 네가 창조주의 의무를 다한다면, 나는 나의 주인에게 온순할 것이다."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짐승처럼 울부짖지 않았다. 논리를 세워 말했다.
"나는 너의 아담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죄도 없이 낙원에서 쫓겨난 타락천사다."
"어디를 봐도 행복이 있더라. 나만 거기서 영원히 제외되어 있었다. 나는 본래 선했다. 비참함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 나를 행복하게 해라. 그러면 다시 선해질 것이다."
"꺼져라. 들을 것 없다. 너와 나는 원수다."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움직이나."
그것의 노란 눈이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네 동족은 나를 보는 순간 무기부터 든다. 나를 만든 너부터 나를 죽이려 드는데, 내가 무엇을 기대하겠나."
"얼음 동굴이 내 집이다. 이 매서운 하늘이 인간보다 내게 친절하다."
바람이 빙하를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를 살인자라 몰아세우면서, 너는 네 손으로 만든 피조물을 아무 가책 없이 부수려 하는구나. 인간의 정의란 참으로 공평하다."
비꼬는 말조차 또박또박했다.
"너희 법조차, 죄인에게는 판결 전에 제 입으로 변론할 기회를 준다. 나에게도 그것을 달라."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소리쳤다.
"왜 자꾸 떠올리게 하느냐. 내가 그 시작이라는 걸,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그 일을! 저주받아라. 네가 처음 빛을 본 그날도, 너를 빚은 이 손도!"
"꺼져라. 그 흉측한 꼴을 내 눈앞에서 치워라."
그러자 그것이 제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렸다.
"이렇게 치워 주마, 창조주여."
나는 그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눈은 감아도 귀는 열려 있겠지. 내 말을 들어 다오. 한때 내가 지녔던 선함의 이름으로 청한다."
"저 위에 오두막이 있다. 이 추위는 너 같은 인간이 견딜 것이 못 되니, 그리로 가자."
그것이 산 쪽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해는 아직 높다. 저 봉우리 뒤로 숨기 전에, 너는 다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정해라."
"내가 인간의 곁을 영원히 떠나 조용히 살지. 아니면 네 동족의 재앙이, 너 자신의 파멸이 될지. 전부 네게 달렸다."
노란 눈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라. 길고, 기이한 이야기다."
"다 듣고 나서 저주하든, 죽이든, 그때 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