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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2화 · [1부] 1화. 예쁜 선물

[1부] 1화. 예쁜 선물

약속한 아침이 왔다.

남자는 선실 창밖의 얼음 벌판을 한참 바라봤다. 이윽고 낮고 고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 펜을 당겨 쥐었다.

여기서부터는 그의 이야기다.

내 이야기는 더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잔인하다. 잃을 것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니까.

나는 제네바에서 손꼽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청렴하고,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사람. 그게 세상이 아는 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 일에 파묻혀 늦도록 혼자였다.

아버지의 결혼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그 사연에 이 집안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가 다 들어 있다.

아버지에게는 보퍼트라는 오랜 벗이 있었다. 한때 잘나가던 상인이었는데, 연이은 불운으로 전 재산을 잃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빚을 한 푼까지 갚은 뒤, 딸 하나를 데리고 소리 없이 도시를 떠났다.

영락한 꼴을 아는 얼굴들 앞에 보이느니, 낯선 땅에서 굶는 편을 택한 거다.

아버지는 백방으로 벗을 찾았다. 도우려고. 신용이든 돈이든 다 내줄 작정이었다.

찾는 데만 열 달이 걸렸다. 루체른 뒷골목, 초라한 셋방이었다.

보퍼트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남은 돈은 몇 달 치 끼니가 전부였고, 일자리를 구하겠다던 다짐은 몸져누우며 끊겼다.

할 일 없이 웅크린 시간은 상심을 곱씹는 시간이었다. 몰락이 마음을 갉아먹고, 마음이 몸을 무너뜨린 거다.

병상을 지키는 건 딸 캐롤라인이었다.

삯바느질을 하고 밀짚을 엮었다. 그 푼돈으로 약값을 대고, 남는 밤으로 아버지를 간호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텼는데, 병자는 나빠지기만 하고 돈은 말라 갔다.

보퍼트는 끝내 딸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버티고 버티던 사람은 그 마지막 일격에 무너졌다.

캐롤라인이 관 앞에 무릎 꺾여 울던 그때, 내 아버지가 방에 들어섰다. 훗날 어머니는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수호신이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다고.

아버지는 고아가 된 캐롤라인을 제네바로 데려와 친척에게 맡겼고, 두 해 뒤 아내로 맞았다.

아버지는 아무나 쉽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곧은 성품 탓에, 마음 깊이 인정한 사람이어야 깊이 사랑할 수 있었다. 고난 속에서 증명된 캐롤라인은 아버지에게 아내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나이 차가 컸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 서로를 아꼈다. 아버지는 혼인을 앞두고 공직을 하나씩 내려놓았고, 식을 올리자마자 어머니의 상한 몸을 돌보러 따뜻한 이탈리아로 떠났다.

정원사가 귀한 화초를 바람 한 점에서도 감싸듯, 모든 것이 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였다. 낯선 풍경과 남국의 공기가 어머니의 기력을 천천히 되살렸다.

그 두 사람의 첫아이가 나다. 나폴리 여행길에 태어나, 두 사람의 사랑을 도맡아 받으며 자랐다.

부모님은 나를 장난감처럼 귀여워하고 우상처럼 떠받들었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인내와 자선을 몸으로 가르쳤다.

다른 집 아이들을 보고서야 알았다. 내 어린 날이 얼마나 유별난 축복이었는지.

비단실에 매여 자란 셈인데, 그 실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매인 줄도 못 느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였다. 부모님은 코모 호숫가에서 한 주를 보냈다.

어머니는 딸을 간절히 원했지만, 아이는 오래도록 나 하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가난한 집 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밑바닥에서 구원받았으니, 이번엔 당신이 수호신이 될 차례라 믿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골짜기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들어섰다. 아버지가 밀라노에 볼일을 보러 간 사이, 나를 데리고서였다. 일에 절어 허리 굽은 농부 내외가, 배곯는 아이 다섯에게 멀건 죽을 나눠 주는 참이었다.

아이 넷은 까무잡잡하고 다부진 개구쟁이들이었다. 다섯째만 달랐다.

야위고, 눈처럼 흰 아이였다. 머리칼은 살아 있는 금빛이라, 누더기를 입고도 왕관을 쓴 듯했다.

맑게 트인 이마 아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눈. 지나가던 누구라도 걸음을 멈췄을 얼굴이었다.

같은 세상에서 났다고 믿기 어려웠다.

어머니의 눈길을 알아챈 안주인이 서둘러 말했다.

"저 앤 우리 애가 아니에요. 밀라노 귀족의 딸인데, 어미는 애를 낳다 죽고, 아비는 그만."

아비는 이탈리아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옥에 갇혔다고 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 재산은 몰수됐고, 아이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젖어미로 맡아 길렀을 뿐인데 정이 들어, 내외는 제 자식처럼 아이를 품었다. 아이는 그 거친 흙에서도 홀로 피었다. 가시덤불 사이의 장미처럼.

어머니는 그 집을 그냥 나서지 못했다.

밀라노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별장 현관에 들어섰을 때, 웬 아이 하나가 나와 뛰놀고 있었다. 그림 속 천사가 걸어 나온 듯한 아이. 사연을 들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농부 내외는 망설였다. 그 애의 존재가 집안의 복이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하늘이 저리 든든한 울타리를 내렸는데 아이를 궁핍 속에 붙잡아 두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내외는 마을 신부와 상의한 끝에 아이를 보냈다.

그 아이가 엘리자베스 라벤자다.

집에 오기 전날 밤, 어머니가 내 귀에 장난스레 속삭였다.

"빅터, 내일 우리 빅터한테 아주 예쁜 선물을 주마."

다음 날 어머니는 금빛 머리 아이의 손을 잡고 내 앞에 세웠다. 약속한 그 선물이라고 했다.

다섯 살짜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엘리자베스는 내 것이다. 내가 지키고, 아끼고, 보살필 내 것.

그날부터 그 애는 내 모든 놀이와 기쁨의 단짝이 됐다.

모두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했다. 집안 어른부터 하인들까지, 그 애를 향한 마음엔 어딘가 경건한 데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 애를 칭찬하면 나는 내 보물이 칭찬받는 듯 우쭐했다.

우리는 서로를 사촌이라 불렀지만, 그 말로는 어림도 없었다. 누이보다 가깝고, 그보다 더한 무엇.

죽음이 갈라놓는 날까지, 그 애는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 했다.

우리는 한 살 터울로 나란히 자랐다. 다투는 법이 없었다. 서로 너무 달라서 오히려 부딪칠 일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시인들이 지은 하늘의 세계를 좇았다. 알프스의 봉우리, 계절의 변화, 겨울의 침묵과 여름의 소란. 그 애에겐 세상의 겉모습이 그대로 경이였다.

나는 달랐다. 겉모습 뒤가 궁금했다.

노을이 질 때마다, 그 애는 속삭였다.

"아름다워."

나는 저 붉은빛이 어디서 오는지를 물었다. 그 애는 답을 몰라도 행복했고, 나는 답을 모르면 잠이 오지 않았다.

세상은 내게 풀어야 할 비밀이었다. 숨은 법칙을 하나 캐낼 때마다 어린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

내 기억의 맨 밑바닥에 깔린 감정이 그거다.

궁금함. 파고듦. 알아냈을 때의, 환희에 가까운 기쁨.

내 성미는 원래 불같았다. 다만 그 불이 장난이 아니라 배움 쪽으로 타올랐을 뿐이다. 언어의 구조도, 나라의 법도, 정치도 시들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하늘과 땅의 비밀이었다.

일곱 살 아래 동생 에르네스트가 태어나자 부모님은 떠돌이 생활을 접고 고향에 자리 잡았다. 제네바 시내의 집, 그리고 호수 동쪽 벨리브의 별장.

우리는 주로 별장에서, 세상과 반 발짝 떨어져 살았다. 나는 붐비는 자리를 싫어해, 학교 친구들에겐 심드렁했다.

단 한 명에게만은 마음을 다 열었다.

헨리 클레르발. 제네바 상인의 아들.

헨리는 이야기에 미친 아이였다. 모험과 고생을, 심지어 위험까지도 그 자체로 사랑했다.

기사도 소설과 모험담을 파고들었고, 제 손으로 영웅의 노래를 지었다. 우리를 붙잡아 연극을 시키기도 했다. 아서왕의 원탁, 성지를 되찾으려 피 흘린 기사들.

"빅터, 너는 원탁의 기사다. 자, 성배를 찾으러 가자!"

목검을 쥐여 주며 헨리가 외치면, 나는 마지못해 기사가 됐다. 솔직히 성배엔 관심이 없었다.

헨리가 영웅의 미덕을 꿈꿀 때, 나는 세계의 설계도를 꿈꿨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우리 둘을 데워 주는 등불이었다. 나는 공부에 파묻히면 무뚝뚝해지는 아이였다. 그 애의 미소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눈길 한 번이 번번이 나를 사람으로 되돌려 놓았다.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가 곁에서 선행의 아름다움을 일러 주지 않았다면, 모험에 취한 그 소년이 그토록 다정한 어른으로 자라진 못했을 거다.

이보다 행복한 어린 시절은 세상에 없었다. 부모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는 폭군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쁨의 설계자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더듬으면 손끝이 따뜻해진다. 불행이 내 정신을 물들이기 전.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던 빛나는 꿈이, 나 하나를 파먹는 어둡고 좁은 반추로 바뀌기 전.

내 운명을 삼킨 그 열정도 처음엔 실개천이었다. 산속 어디서 솟았는지도 모를 만큼 작고 하찮은 물줄기. 그것이 흐르며 몸을 불려, 끝내 내 모든 기쁨과 희망을 쓸어 가는 급류가 됐다.

그 실개천의 발원지를 나는 정확히 안다.

열세 살, 비 오던 날이었다.

가족 모두 토농 근처 온천으로 나들이를 갔다. 날씨가 심술을 부려, 우리는 꼬박 하루를 여관에 갇혔다.

빗줄기가 하루 종일 창을 두드렸다. 지루함에 몸이 뒤틀리던 나는 여관 서가를 뒤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한 권을 뽑았다.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무 기대 없이 책장을 넘겼다.

몇 장 만에 지루함이 통째로 증발했다.

책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전혀 다른 세계를 말했다.

자연에 숨은 힘. 원소를 부리는 법. 생명의 비밀에 닿는 길.

저자는 증명하겠다고 장담했고, 믿기 힘든 사례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열세 살에겐 그 장담을 의심할 눈이 없었다.

머릿속에 새 빛이 켜지는 듯했다. 세상 모든 문을 여는 열쇠 꾸러미를 주운 기분이었다.

나는 책을 움켜쥔 채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이 사람 말이, 자연엔 숨은 힘이 있고, 그 힘을 다룰 수만 있으면."

아버지는 표지를 흘긋 보고 말했다.

"아,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얘야, 이런 데 시간 버리지 마라. 죄다 한심한 허튼소리다."

그게 다였다. 아버지는 도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만약에.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곱씹는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곁에 앉아 일러 줬다면. 아그리파의 시대는 끝났다고, 새 과학이 그 몽상을 어떻게 밀어냈고 대신 무엇을 진짜로 해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면.

나는 순순히 책을 덮었을 거다. 어쩌면 내 생각의 물줄기는 영영 다른 골짜기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의 심드렁한 눈길은 정반대로 읽혔다.

읽어 보지도 않고 하는 소리다. 어른들이 감춰 둔 보물이라는 뜻이다.

금지는 불쏘시개가 됐다. 나는 여관 구석에 숨어, 촛불이 손가락 한 마디씩 줄도록 책장을 넘겼다. 한 장 한 장이 꿀처럼 달았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삼키는 게 꿀이 아니라 독이라는 걸.

여관 서가의 낡은 책 한 권.

내 모든 이야기의 씨앗은, 그렇게 심어졌다.